잠만 잘거야, 야옹아?

잠만 잘거야, 야옹아?

익명 0 45 02.10 12:00
#68

다른 대도시로 이사를 오고 난 뒤 이 녀석은 곧잘 잠만 자고 있습니다.

이전에도 잠을 적게 잔 건 아니었지만,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.

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, 이 녀석은 인간이 구획한 시공간의 규격인 하루 24시간 가운데 22-23시간을 잠만 자는 것 같습니다.

처음엔 아무래도 어미로서의 고단한 임무를 훌훌 벗어던지고, 이젠 홀로 남아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만, 아무리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생을 이런 식으로 낭비?하고 있는 모습이 과히 적절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.

하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미쳐 억지로 깨워도, 그런 뒤 여기저기 만지고 부비고 하면서 잠을 달아나게 해도 그때만 잠시뿐, 다시금 이 녀석은 이불 아래에 파묻혀서 잠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.

삶을 잠으로만 채우겠다는 심보가 괜시리 걱정되면서도, 아무려면 이 녀석이 허투루 묘생을 탕진할까 싶기도 합니다.

그도 그럴 것이, 이 녀석은 잠을 통해 아무래도 또 다른 삶을 대리적으로 꾸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.

종종 보면, 별의별 신음성 소리가 다 들리고, 수염이 파르르 떨리며 몸이 꿈척꿈척거리기도 하는 양이, 이 세상이 하 심심하여, 이젠 잠을 통해서나마 저 세상을 꿈꾸는 게 아닐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.

고양이도 꿈을 꾸는가?

일견 엉뚱하고도 황당한 질문에 집사는 한 점 의혹도 없이 결연하게 단언합니다.

고양이도 꿈을 꿉니다.

그렇게 우리집 야옹이는 꿈을 통해 아바타를 타고 또 다른 세상에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.

그러고 보면, 지금 우리 집이 주위 환경이나 내부 구조상 참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만끽하기에는 과히 바람직한 형세는 아닙니다.

다른 건물들로 꽉 막혀서는 빛이 차단된 채 낮이나 밤이나 어둡고 침침한 공기가 괴괴하게 떠다니고, 창문턱은 원체가 높고 좁아서 신경 손상으로 뛰고 내릴 수 없는 이 녀석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철옹성처럼 암담하게 서 있습니다.

설령 집사가 억지로 창문턱에 올려놓고 그 녀석을 안아 두어도, 야옹이의 시야 대상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건물들의 텁텁한 벽들뿐이니, 더 이상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?

1층에 위치해 있지만, 반지하나 지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이 집을 무턱대고 고른 집사의 섣부름과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것이었습니다.

마냥 집이 넓어서, 화장실과 주방이 번듯하게 갖춰져 있어서 덜컥 계약해버린 집사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었습니다.

이전에 야옹이의 고향에서 살았던 그 집, 비록 좁아터진 골방 하나에 불과한 그 집이었지만, 얼마나 너른 창문과 쏟아지는 햇볕을 안고 있었던가, 그 창문 밖으로는 얼마나 진귀한 자연 경관이 펼쳐져 있었던가 회고해볼 때면, 집사는 그저 고개가 수그러짐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.

그러고 보면, 그 녀석의 잠을 무던히도 탓할 처지는 아닙니다.

그저 그 녀석의 생리와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지 못하고 이 집을 선택한 집사의 무람됨이 화근일 따름이었습니다.

그러니 지금까지 거의 2년 동안 이 녀석은 시나브로 잠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.

물론, 그렇다고 해서 이 녀석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저를 싫어하는 구석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.

녀석은 집사가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, 아주 늘어지게 잘 자고 있습니다.

아마도 잠을 통해 꾸는 또다른 삶이 내내 만족스러운지도 몰랐습니다.

하지만 그럼에도, 집사는 요사이 시나브로 고민이 많습니다.

이제 곧 이사철이 다가오는데, 잠을 덜 잘 수 있는 환경으로 야옹이를 데려가야겠다 강단지게 마음먹고는 하는 것입니다.

잠만 자느라 살도 덕지덕지 붙어 뚱냥이가 되어버린 녀석을 보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을 굳힙니다.

녀석이 엉거주춤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좀 더 낮은 턱이 있고, 그렇게 올라서면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찬연한 햇빛이 쏟아지는, 그래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 뭇 생명체들이 살아 약동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그런 집!

그런 집을 이번에는 기어코 들어가리라! 집사는 야무지게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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